기적
노자규의 골목이야기
K-시니어라이프 | 입력 : 2024/11/26 [09:56]
기적
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에 하나둘 직원들이 떠나가더니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
아침을 깨워 마주하던 동료들과의 봄 햇살 담벼락에 토담토담 피어나는 풀꽃 같은 날들은 가고
앙상한 겨울 끝 가지만 남은 하루를 애써 붙들고선 마지막이 될 술잔들을 기울이다
달빛에 잠든 별을 따라 집으로 와서는 내일부턴 백수기업에 취직할거라고 걱정 마라며
그 회사엔 출퇴근 시간도 없는 자유로운 회사이고 실적 못 올린다고 뭐라 하는 상사도 없는 꿈의 직장이라며.
논바닥 갈라지는 가슴만 내보이다 잠이 들고 있었습니다
다음날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거라며 새벽을 걸어나간 남편이
어느 날은 페인트 냄새를 어떤 날은 기름때를 또 어느 날은 이삿짐을 날랐는지 허리를 붙잡고
삶이라는 무게에 짓눌려다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는게 바늘구멍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습니다
밤새 공공거리다 새벽이 일으켜 세워준 하루를 내달려 나간 남편이 놓고 간 도시락 가방을 들고서 바람이 알려준 곳으로
약국에서 산 파스도 함께 챙겨 도착했을 때 멀리서 연신 고개만 숙여 보이고 있는 한 남자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 음성이 먼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
"어이 김씨 자꾸 이럴 거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'
'죄송함더 이제 실수없이 잘할 수 있으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이소 라는
목소리를 듣고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귀를 막고선 뒤돌아서 집으로 걸어오고 말았습니다
술한잔에 굽어진 달을 업고 집으로 들어온 남편을 보며
"여보.. 오늘도 힘들었지예?'
:그 뭐시라꼬 내가 관둘까 봐 우리 현장 소장은 난리도 아이다"
그렇게 남편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
저무는하루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곤한 초저녁잠에 빠진 남편의 도시락 안에는
그날 일한 일당이 들어가 있는 날보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날들이 더 늘어갔지만
애써 말하지 않아도 묵음으로 전해지는 느낌표 하나로 참 괜찮은 날들이라 다독이며
손을 저어봐도 무엇하나 걸릴 것도 없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때
언제 깨어났는지 남편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내어놓더니 담벼락에 기대어선 달을 친구삼아 까만 그을음만 남은 속을 마저 비워내려 앉았습니다
"당신도 이리 온나. 내랑 한 꼬프하자"
꼴 꼴꼴. 따르는 이 소리가 예술인기라 당신 내 벌이가 신통찮아 요즘 살아낸다고 욕보제
게안심더.. 이게 무슨 고생이라꼬예'
"여보... 당신과 내캉 한 번도 부자로 살아 본 적은 없지만도 부자에게는 없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겐 있는 게 있다"
"그게 뭔데예?
"남을 생각하는 어진 마음인데 그 어진 마음이 부자들에겐 없단 말이다.
"와예"
그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첫 번째가 돈이고 두 번째가 권력이고 세 번째가 욕심 때문인기라
당신도 그 세 놈하고 친해지고 싶나?"
"언지예. 없는 거 투성이라도 사람한테는 사람 냄새가 나야 사람 아이겠심미꺼 ."
"하모. 우리는 절대 그 세 놈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 제이...
그렇게 새벽이 술잔 앞에 놓일 때까지 남편과 나는 소주 한 잔에 아픔과 허물을 덮어주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
남편은 선 잠결에 듣는 바람 소리를 따라 가방에 주섬주섬 내가 챙겨준 도시락을 넣고는
'내 오늘은 이 도시락 안에 돈 이빠이 넣어 올끼다.. 하하하하"
라고 웃어 보이며
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잘사는 그런 기적이 올끼다.
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남편을 보며 전 소리치고 있었습니다
나의 기적은 당신이라고.
펴냄/노자규의 골목 이야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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