빛바랜 사직서
노자규의 골목이야기
K-시니어라이프 | 입력 : 2025/02/05 [08:11]
빛바랜 사직서
"아저씨... 카드 여기 있어요"
헬멧을 눌러쓴채 아무 말 없이 빠져나오는 내 등 뒤에 대고
"비 오는데 안전 운전하세요 라는 아들의 말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
오토바이에 앉은 이 순간까지 긴 여운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들어오는 문자 하나
"아버지 금방 통닭과 피자 왔어요 안 먹고 기다릴 테니 끝나는 대로 빨리 오세요"
오토바이 안장 밑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내려왔던 엘리베이터를 눌러
다시 올라가고 있었다
"아버지 회사는 어찌 일 년 내내 야근이에요?"
9년 전 아내의 죽음 이후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어 보는 건 생일날 아니면 힘든 것 같다고 말하는 두 아들의 넋두리를 찬으로 올려 때늦은 생일상을 먹고 있던 내게
"곧 정년퇴직 하시면 친구분들이랑 등산도 다니시고 이젠 쉬셔야죠 ..."
두 아들의 걱정스러운 푸념에 겨우 다른 반찬을 집어들 용기를 난 얻고 있었다
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내 가슴속에 품고 다녔던 빛바랜 사직서는
아빠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한
가슴으로만 던져야 하는 게 사직서란 걸 알고 있었기에
깡으로 버틴 세월 30년이 준 선물은 희망퇴직.
"그래. 오래 다녔지 이제 관둘 때도 된 게지"
후배들을 위해 용퇴를 결심하고 당당히 회사를 걸어 나오던 어느 가을날을 우두커니 세워놓고 지난 기억의 물레를 돌려보고 있었다
'돈 좀 많이 벌어와 "
뻔한 봉급쟁이 형편에 도둑질 말고는 돈 날 곳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내의 그 말에
"물고기를 나무 타기 실력으로 평가하지 마"
그럼 돈 더못 벌어 올 거면 일찍이라도 들어오든지 결국 일찍 들어오라는 말을 돌려서 하던 아내의 그 말투와 그 몸짓 들은
이젠 꿈속에 꿈이 되어버린 채 내 얼굴에 그려진 이 눈물을 지우면 알게 될까?
30년을 가슴에 품고 다녔던 사직서를 던지고 나온 그날의 그 아픔들을 날리는 꽃잎만으로도 웃으며 달려가던 이 길의 끝 막다른 곳 그 어디쯤 앉아 또 하루를 보내야만 하는 오늘이 야속하지만 난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
아버지라는 직업의 계약기간은 여전히 유효했다며.
낮엔 퀵 기사 밤엔 야식 배달 일로 아들들 몰래 하루를 연명하는 이 연극의 끝이 어딜 진 몰라도
가족이란 이름 앞에선 아버지란 이름은 한없이 작아져야만 했기에
오늘도 목젖에 걸린 멍울을 어루만지다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며 한참을 앉아 밤바람에 지난 추억을 누리고 있다
직업 앞에 붙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 앞에서 타인의 계절은 봄인데 나의 계절은 늘 겨울 같게만 느껴지는 이 하루를 살며
결국엔 타인을 해석하기보다 포용하기로 마음먹을 수 밖에 없는 이 다짐이
검은색 도화지가 된 허공에 번진 하얀 연기를 바람 붓으로 그려놓은 한 폭의 수채화를 따라 흘러가는 걸 보며
고단했던 그 삼십 년에 하루를 더 없어 본다
노력을 멈추는 순간 아버지란 이름을 잊어버리는 거라며.
내 몸을 움직여 사는 게 좋아서 택한 직업이었기에 오직 가족 앞에서만 울기로 약속하며 오늘 하루를 시간첩에 넣고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순간
카톡... 카톡
배달을 하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 밑에는
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...'
라고 써 놓은 문자가 눈물로 얼룩지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은 저절로 열리고 있었고
두 아들은 평생을 품고 다녔던 그 사직서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다며 품으로 다가와 안긴다
"아버지. 이젠 그 사직서 저희에게 주셔도 돼 .요.."
두 아들과 어깨동무를한 채 바라보는 밤하늘에 만개한 별꽃들로
내 마음을 조각조각 써 내려 가며 난 말하고 있었다
아버지란 직업의 그 사직서는 죽는 그날까지 가슴에 간직하는 거라고
펴냄/노자규의 골목 이야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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